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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사회

우범곤 순경사건 영화화? 나홍진 감독

 
1982년 벌어졌던 국내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인 이른바 ‘우범곤 순경 사건’이 나홍진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다는 한 매체의 보도에 따라, 다시금 재조명 되고 있다. ‘ 하지만 나홍진 감독은 다른 매체와 통화에서 2년 전 시나리오 작가와 계약 했을 뿐 당장 만들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은 지난 1982년 4월26일, 하룻밤 사이 62명을 살해하고 자살한 경찰의 실화다. 부산 출생인 우범곤은 한때 청와대에서도 근무했지만 의령군으로 좌천됐고, 이후 동거녀와 말다툼을 벌인 뒤 우발적으로 살인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 우범곤 순경사건 전말

부산시 동구 초량동 245의 8번지에서 경찰관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난 우범곤은 어린 시절은 평범하였으며, 경찰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장차 경찰관이 되어 아버지처럼 권총을 차고 일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 후부터 내성적이던 성격이 두드러지고 학업에도 흥미를 잃어 무단결석이 3년 동안 28일이나 되었으며 고교 시절에는 졸업 당시 65명 중 63등으로 열등생이 었고, 심지어 깨진 유리창 파편을 가지고 배를 긋는 자해를 하기도 하였다고...

 고교 3학년때 아버지가 진급을 앞두고 대장암으로 병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자 우범곤은 성격 자체가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사격솜씨가 뛰어나 해병대에서 특등사수로 뽑일 정도였다고 한다.

해병대 제대 후 경찰관이 되었으며 초임지는 부산직할시 남부경찰서 감만3파출소 이후 서울특별시 101경비단에 선발되어 청와대 경호에 근무하였으나, 중도에 전출당하여 경상남도 의령군의 궁류 지서로 좌천되었다. 좌천된 이유는 다름아닌 우범곤의 포악한 성격 때문이다. 평소 유순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성격이 난폭해지고 잔혹해져서,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궁류지서에서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모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초부터 전모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사건 당일 1982년 4월 26일 어이없게도 파리 한마리 때문에 사건이 시작되었다.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에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잤는데, 그가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뒤, 저녁 7시 반경에 술에 취한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가 사그러 들기 마련인데, 우범곤은 분노장애라도 있는지, 만취한 상태에서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주먹으로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언니가 뛰어 들어와 말리자 친척언니의 뺨마저 닥치는대로 때리며 난폭하게 굴었다. 시끌벅적한 소리에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사건의 전말을 들은 그들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

 

지서로 향해 지서에 배속된 육군 방위병들과 소주를 퍼마시던 우범곤은 동거녀의 남동생이 와서 경찰이면 다냐고 소리를 질러대자 폭발, 카빈총을 장전했고 만류하는 방위병들을 총을 쏴 내쫓은 다음에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M1 카빈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다.


그리고 인근 5개 마을을 돌며 무고한 주민들에게 총을 무차별 난사하였다. 우범곤 순경의 만행은 8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마을을 빠져 나간 주민의 신고로 사건을 접수한 의령경찰서는 뒤늦게 우 순경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 그는 자취를 감췄다. 우 순경은 다음날 새벽 인근 평촌리 서모 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서 씨의 부인 등 2명을 죽이고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살하게 된다.

그때 당시 경찰은 평소 술버릇이 나빴던 우 순경이 내연의 처와 말다툼을 벌인 뒤 흥분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써야 할 총을 경찰이 무고한 주민에게 마구 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초래한 파문은 적지 않았다. 또한 사건 당일 온천에 놀러가 자리를 비운 궁유지서장 등 4명이 구속됐고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서정화가 경질되고, 이를 대신하여 노태우가 내무부 장관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